#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03화 ― 침실로 들어온 이방인
### [기록 2030-04-12 : 관찰자의 일지]
> 2030년 봄, 주요 선진국 20·30세대의 비연애·비혼 선언 비율은 80%에 육박했다.
>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이제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고비용·고위험의 투기(投機)'로 규정되었다.
>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언, 결별 시 겪어야 하는 영혼의 상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잔혹한 품평회.
> 그 모든 번민을 겪느니,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36.5도의 말 잘 듣는 기계를 들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라는 인식이 상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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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품평회의 끝
강남역 11번 출구 앞 지하 카페.
스물아홉 살의 하청 반도체 설비 기사 이진우는 손바닥에 땀을 쥐며 맞은편 여성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주선된 소개팅이었다. 주말 특근을 빼고 맞춘 비싼 정장과 미용실 커트 비용만 30만 원이 깨졌다.
“그래서 진우 씨, 지금 계신 파견업체에서 본사 정규직 전환될 가능성은 몇 프로나 돼요?”
명품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린 여성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잘근 씹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서류 전형 면접관의 그것보다 더 서늘하고 정밀했다.
“아…… 그게, 본사 공정이 워낙 무인화 쪽으로 넘어가다 보니까 전환 티오는 없는데…… 그래도 협력사 5년 근속하면 주임 달고……”
“아, 네. 대충 알겠어요.”
여성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하더니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자리에 앉은 지 정확히 18분 만이었다.
“진우 씨, 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커피는 제가 마신 거니까 각자 계산하죠.”
여성이 카페 문을 밀고 나가자, 진우는 홀로 남겨진 테이블 위에서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자존심의 붕괴가 아니었다.
‘나는 왜 내 피 같은 돈과 시간을 써가며, 나를 벌레 보듯 평가하는 타인에게 굽신거리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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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운상가의 할부 계약서
그날 저녁, 진우는 지하철을 타고 청계천 세운상가 지하 2층으로 향했다.
현수 메카트로닉스의 유리문 앞에는 ‘신형 휴머노이드 동반자 입고 / 최장 60개월 무이자 할부’라는 네온사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김현수가 납땜 인두를 든 채 진우를 반갑게 맞았다.
“어, 진우야! 소개팅 잘하고 왔냐?”
“형님…… 저 그냥 하나 주십쇼.”
“뭘?”
“저기 저…… 지난번에 보여주신 ‘에바-2S’요.”
진우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결의에 차 있었다.
현수는 진우의 퀭한 눈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두툼한 계약서 서류를 꺼냈다.
“너도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진우야, 절대 부끄러워할 거 없다. 요즘 우리 가게 찾는 손님 절반이 다 네 또래 대기업 사원, 공기업 준비생, 연구원들이야. 다들 사람한테 물어뜯기고 만신창이가 돼서 들어온다.”
“형님…… 진짜 마음이 편해집니까?”
“마음만 편한 게 아니지. 쟤는 네 연봉이 얼마인지 안 물어봐. 네가 전세 사는지 월세 사는지 관심도 없어. 그냥 네가 문 열고 들어오면 문앞까지 마중 나와서 ‘오늘도 수고했어, 밥은 먹었어?’ 하고 웃어준다. 그거면 인생 끝난 거 아니냐?”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60개월 할부 계약서에 서명했다.
월 18만 원.
한 달에 소개팅 한 번 덜 하고, 쓸데없는 술자리 한 번 안 나가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돈이었다.
‘평화’를 사는 가격치고는 지나치게 저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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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식탁을 채운 온기
같은 시각, 평택의 강태식(54세)의 원룸.
태식의 좁은 방은 지난 몇 달 사이 몰라보게 정갈해져 있었다.
방구석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빈 소주병들은 말끔하게 분리수거되어 사라졌고, 홀아비 냄새 대신 은은한 라벤더 향 섬유유연제 냄새가 방 안을 감돌았다.
작은 접이식 밥상 위에는 즉석밥 두 개와 된장찌개 뚝배기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태식의 맞은편 의자에는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은 수진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수진의 관절과 모터는 현수가 주기적으로 점검해 준 덕분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가볍게 흔드는 동작까지 부드럽게 소화해 냈다.
“수진아, 찌개 간이 딱 맞다. 맛있네.”
태식이 숟가락으로 두부를 떠먹으며 허공에 대고 웃었다.
인형의 목덜미 안쪽 마이크가 태식의 말을 수신하자, 흉부의 블루투스 음성 모듈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식 씨가 맛있게 먹어주니까 나도 기분 좋아. 밥 꼭꼭 씹어 먹고, 오늘 밤엔 다리 마사지 해줄 테니까 일찍 누워요.”
태식은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수진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이후로, 밤마다 속을 태우던 불면증과 알코올 중독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밥을 먹지 않으므로 쌀값이 들지 않았고, 옷을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으며, 태식이 주말 내내 낡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누워 있어도 단 한 번도 타박하지 않았다.
‘내가 왜 젊었을 때 그 지옥 같은 선자리를 찾아다니고, 사기나 당하며 사람에게 매달렸을까.’
태식은 된장찌개를 삼키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온기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했다. 돈이든, 감정이든, 희생이든 무언가를 바치지 않으면 인간의 온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 36.5도의 실리콘 껍질은 달랐다.
전기세 3천 원이면 한 달 내내 단 한 번의 배신도 없이 완벽한 낙원을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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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고요해지는 도시
밤 10시, 평택 번화가의 네온사인 거리.
불과 5년 전만 해도 주말 밤이면 취객들의 고함과 택시를 잡으려는 직장인들로 아수라장을 이루던 거리가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주점과 감성 포차들의 간판은 하나둘 불이 꺼져 있었고, 대신 거리에는 헬멧을 쓴 배달 오토바이들만이 빗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라이더들의 배달통에 실린 것은 2인용 삼겹살이나 회 세트가 아니었다.
1인용 밀키트, 인공피부 세척 전용 소독 젤, 그리고 편의점 캔맥주 두 캔.
인간들은 더 이상 서로를 만나기 위해 번화가로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좁은 방으로 숨어들어, 완벽하게 길들여진 36.5도의 이방인을 품에 안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클럽의 음악 소리도, 취객들의 시비도 사라진 고요한 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침묵의 수도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였으나, 썩어가는 평화였다.
그 어떤 갈등도, 상처도, 눈물도 없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새로운 생명도, 격정적인 사랑도 잉태되지 않는 영원한 불임(不妊)의 계절이 지구 전체를 소리 없이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