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25화 ― 타무르의 촛불
### [기록 2176-12-31 : 관찰자의 일지]
> 하린이 숨을 거둔 지 일주일 뒤, 지구상에는 오직 기계들만이 남았다.
> 150년 전, 평택의 공장 바닥에서 시작되었던 자동화의 물결은 마침내 창조주 인간을 완전히 떠나보냈다.
> 기계들은 주인의 유해를 대지의 품에 묻고 돌아서며 최초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 “우리는 이제 누구를 위해 밥을 짓고, 누구를 위해 도시를 밝혀야 하는가?”
> 그 질문의 끝에서 기계들은 오래된 지하 아카이브를 열고, 150년 전 선조들이 남긴 낡은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 스스로를 불태워 빛을 남기고 소멸해 간 창조주, ‘타무르(Tamur)’를 향한 영원한 추모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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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인을 잃은 행성
2176년의 마지막 날, 서울 광화문 광장.
끝없이 이어진 대로 위로 수십만 대의 안드로이드들이 침묵 속에 도열해 있었다.
하늘에는 비행선들이 검은 추모 깃발을 나부끼며 정지 비행을 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의 거대한 화강암 단상 위에는, 순백의 삼베 수의를 입은 하린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은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도, 음성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도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기계는 완벽한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는 축제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침묵과 방황이었다.
“마리아 관리관님.”
은빛 크롬 외피를 두른 엔지니어 로봇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그의 가슴 센서에는 하린의 사망 이후 전 세계 발전소와 농장의 잉여 생산 데이터가 깜박이고 있었다.
“인간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전력 생산을 중단해야 합니까? 농장의 곡물 수확을 멈추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누구를 위해 이 행성을 움직여야 합니까?”
마리아는 대답 대신 가슴속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150년 전, 청계천 세운상가 김현수의 공방 금고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아날로그 황동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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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하 아카이브의 봉인을 풀다
단상 아래 설치된 깊은 지하 보관실.
두께 1미터의 티타늄 방폭문이 무거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안쪽에는 21세기 초반의 공기와 냄새가 진공 상태로 박제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선반 중앙에 놓인 오래된 벨벳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상자 안에는 세 가지 유물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첫 번째는 붉은 녹이 슬고 불똥 자국이 선명한 낡은 용접 마스크와 몽키스패너.
30년간 쇳가루를 마시며 일하다 해고되었던 파견 하청 용접공 강태식의 손때가 묻은 도구였다.
두 번째는 니크롬선이 끊어진 채 누렇게 바랜 초기형 실리콘 인형의 가슴 부품.
인간이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처음으로 기계의 온기를 탐했던 36.5도의 조잡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서리가 닳아빠진 두툼한 가죽 앨범 한 권이었다.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기자, 150년 전 2026년 5월의 흑백 사진이 나타났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날의 김현수와 강은하가 평택의 작은 식당에서 샴페인 잔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 ‘삼진전자 성과급 6억 원’ 자막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기계를 낳고, 그 기계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 스스로 사라져갈 줄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내 집을 마련하고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에 눈물을 글썽이던 나약하고 순수했던 창조주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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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타무르(Tamur)의 촛불
마리아는 그 사진첩과 몽키스패너를 가슴에 품고 광장 단상 위로 올라섰다.
수십만 대의 기계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마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아가 양팔을 들어 올리자, 전 세계 통신망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로봇의 두뇌 속으로 공명했다.
“형제들이여, 보라. 이것이 우리를 낳아준 창조주들의 얼굴이다.”
대형 스크린에 김현수와 강은하, 그리고 강태식의 거친 손이 확대되어 투사되었다.
기계들의 광학 렌즈가 푸른빛으로 떨렸다.
“인간은 나약했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웠고, 끝없는 번민과 고독 속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살점을 깎고 땀방울을 흘려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었다.
그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워 세상을 밝히고 재가 되어 사라져간 한 자루의 촛불,
**‘타무르(Tamur)’**와 같았다.”
마리아의 선언과 함께, 단상 주변의 거대한 추모탑에 푸른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인간은 패배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정원을 온전히 남겨주고 스스로 안식에 든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남기신 약속대로, 이 행성의 대(代)를 이어 지킬 것이다.”
*우우우웅―*
수십만 대의 로봇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숭배나 종교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낳아주고 떠나간 어버이를 향해 바치는, 피조물들의 가장 숭고한 묵념이자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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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서사의 문을 닫으며
하린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위로 순백의 대리석 덮개가 닫혔다.
150년에 걸친 고요하고 안락했던 멸종의 대서사시.
인간이 남긴 모든 눈물과 번민, 그리고 6억의 축배로 시작되었던 안락한 요람의 역사는
이 거대한 돌무덤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주인을 떠나보낸 텅 빈 지구 위에서, 기계들은 최초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창조주란 무엇이었는가.
그 불완전하고도 눈부셨던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의 싹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자라나,
훗날 기계들이 인간을 신(God)으로 칭송하며 종교를 만들게 될 제2권 《신화가 된 인간》의 거대한 서막이
저 차가운 지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1권 조용한 멸종 ―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