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텍스트 집중 독서 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미지 및 영상이 숨김 처리되었습니다.)
제1권(조용한 멸종) 제1부(평택의 아침) 제1장 제1화 : 6억의 유혹, 그리고 새벽의 불꽃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01화 ― 6억의 유혹, 그리고 새벽의 불꽃
## 제01화 ― 6억의 축배, 타락의 첫 모금
### [기록 2026-05-18 : 관찰자의 일지]
> 2026년 봄,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부였던 평택에서 자본이 인류에게 건넨 역사상 가장 달콤한 사과(Apple)가 베어 물어졌다.
> 삼진전자가 지급한 1인당 평균 6억 원의 특별 성과급은 노동자들을 투사에서 소비자로,
> 공장의 주역에서 안락함에 취한 퇴장객으로 바꾸어 놓았다.
> 인간은 기계에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 6억이라는 거대한 돈의 유혹에 기꺼이 눈이 멀어, 스스로 공장 문을 열어주고 물러났을 뿐이었다.
> 2026년 봄, 대한민국 평택에서 자본이 인간에게 건넨 것은 상금이 아니라 '가장 정교한 마약'이었다.
> 1인당 평균 6억 원. 평생을 땀 흘려 일해야 만져볼 수 없던 거액이 하루아침에 계좌에 꽂히자,
> 14년간 현장을 지켜온 성실한 기술자들은 순식간에 탐욕과 허영의 소비자들로 탈바꿈했다.
> 인간은 기계에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 6억이라는 달콤한 마취제에 취해, 스스로 자신의 노동과 자존심을 헐값에 팔아넘겼을 뿐이었다.
---
### 1. 6억 5천만 원의 벼락
### 1. 0(영)의 개수를 세는 손가락
오전 9시 30분, 강당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은 공장 담장을 넘어 평택 전체를 뒤흔들었다.
생산기술팀 14년 차 대리이자 ‘스마트 팩토리 TF’ 실무를 맡고 있던 김현수(38세)는 복도로 빠져나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사내 포털 인트라넷 상여금 조회 화면.
“띵동.”
**[KB국민은행 05/25 10:02 650,000,000원 입금(삼진전자 특별성과급)]**
2026년 5월 25일 오전 10시 02분.
삼진전자 평택 2공장 생산기술팀 김현수(38세)의 스마트폰 화면 상단에 알림이 떴다.
육억 오천만 원.
계좌에 일괄 입금된 굵은 고딕체의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현수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차가운 복도 벽을 짚었다.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려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면 속 숫자를 손가락 끝으로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세 번, 네 번, 열 번을 세어도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14년 동안 영하의 칼바람 속에서 배관 도면을 보고, 기름 냄새에 찌든 작업복을 빨래방에 맡기며 모은 전 재산이 청약통장과 전세보증금을 합쳐 겨우 8천만 원이었다.
매달 300만 원 남짓한 월급에서 적금 150만 원을 붓고 나면, 데이트 비용 5만 원 쓰는 것조차 손이 떨리던 30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
그에게 6억 5천만 원은 단순한 보너스가 아니었다. 삶의 궤도 전체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리는 거대한 벼락이었다.
“오빠! 오빠! 지금 인터넷에 난리 났어! 뉴스 속보 뜬 거 진짜야?”
전화기 너머에서 은하(35세)의 숨 넘어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며 십원 한 장 아끼려고 구내식당 식권만 챙기던 은하였다.
3년 동안 사귀면서 “우리 돈 모아서 내년엔 꼭 식 올리자”고 다짐할 때마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가슴 졸였던 그 은하가, 전화기 너머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어, 은하야…… 진짜야. 나 방금 계좌 확인했어. 6억 5천 들어왔어.”
“으아앙! 오빠! 우리 이제 집 살 수 있어! 우리 이제 진짜 결혼할 수 있어!”
계좌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누르면, 이 돈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진짜 돈이었다.
현수의 입술 사이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뼛속까지 찌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뇌수까지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숨이 막힐 듯한 ‘자본의 야만적인 쾌락’이었다.
---
### 2. 가격표를 보지 않는 밤
### 2. 백화점의 공주가 된 은하
그날 오후부터 평택 공장은 이미 일터가 아니었다.
라인 가동은 멈췄고, 직원들은 3삼오오 모여 스마트폰으로 외제차 견적서와 아파트 청약 앱을 켜놓고 있었다.
“야, 너 볼보 뽑냐? 난 포르쉐 매장 예약 걸었다!”
“고덕 자이 로열층 매물 지금 피(프리미엄) 5천 붙었는데 바로 쏜다!”
누구도 부품 결합 공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공장 전체가 거대한 카지노의 잭팟 파티장으로 변해 있었다.
“오빠……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이거 진짜 우리 돈 맞아?”
퇴근 후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지하 명품관 식품 코너.
은하를 만난 현수의 손에는 난생처음 쥐어보는 백화점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은하는 얼굴이 상기된 채 카트를 밀며 정육 코너 앞에 섰다.
100그램에 3만 8천 원짜리 투플러스(1++ No.9) 한우 살치살과 안심 스테이크.
예전 같았으면 호주산 냉동 소고기 할인 스티커가 붙는 저녁 8시까지 서성이던 은하였다.
서울 압구정의 한 명품 백화점 1층 로비.
현수의 팔짱을 낀 은하(35세)의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중소기업 총무부에서 10년째 영수증 풀칠을 하며 복사용지 한 장 아끼라고 이사에게 쿠사리를 먹던 평범한 말단 경리였다.
그녀가 입은 옷은 지하상가 매대에서 2만 9천 원을 주고 산 원피스였고, 어깨에 멘 가방은 5년 전 아웃렛에서 70% 할인받아 산 인조가죽 크로스백이었다.
“오빠…… 이거 진짜 그냥 담아도 돼?”
“담아. 세 팩 담아. 와인도 제일 좋은 걸로 골라.”
샤넬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벨벳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은하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시원한 탄산수 준비해 드릴까요?”
현수는 거침없이 카트에 고기와 프랑스산 와인을 집어넣었다.
계산대 모니터에 찍힌 금액은 42만 원.
평소 현수의 한 달 용돈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지만, 현수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카드를 내밀었다.
*승인 완료.*
영수증이 출력되는 그 1초의 찰나, 현수의 척추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돈이 주는 권력.
가격을 묻지 않고, 원산지를 따지지 않고, 오직 내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집어들 수 있는 이 잔인하도록 달콤한 자유.
프랑스산 페리에 탄산수가 은빛 쟁반에 담겨 나왔다.
유리 쇼케이스 안에는 검은색 캐비어 가죽에 금빛 버클이 번쩍이는 클래식 플랩백이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님, 이 제품은 오늘 아침 프랑스 본사에서 단 한 점 입고된 희귀 모델입니다. 가격은 1,480만 원입니다.”
천사백팔십만 원.
은하가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만질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은하는 질겁하며 손을 뒤로 뺐다.
“오, 오빠…… 너무 비싸. 그냥 나가자……”
그때 현수가 주머니에서 검은색 플래티넘 카드를 꺼내 매장 직원 앞으로 툭 던졌다.
“일시불로 긁어주세요. 상자 포장 제일 예쁜 걸로 해주시고요.”
*띡.*
단 1초 만에 1,480만 원이 승인되었다.
직원의 눈빛이 순식간에 극진한 존경으로 바뀌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 사모님께 너무나 우아하게 잘 어울리십니다.”
쇼핑백을 받아 든 은하의 눈에서 기어이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자신을 멸시하던 세상, 버스 환승 시간 30분을 놓칠까 봐 구두 굽이 부러져라 뛰던 비루한 청춘.
그 모든 굴욕이, 저 1,480만 원짜리 검은 가죽 상자 하나 앞에서 마법처럼 지워져 나가고 있었다.
“오빠…… 고마워…… 나 평생 오빠한테 잘할게……”
은하는 백화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현수는 은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묘한 우월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돈이란 이런 것이었다.
도덕도, 정의도, 피땀 어린 노동도 필요 없었다.
그저 카드를 긁는 순간, 세상은 내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
### 3. 평택 32평의 안식과 늘어난 씀씀이
주말, 현수와 은하는 평택 고덕국제신도시의 대단지 신축 아파트 분양사무소를 찾았다.
통장에 찍힌 특별 성과급 6억 5천만 원.
14년간 쇳가루를 마시며 일해도 결코 만져볼 수 없었던 기적 같은 거액이었다.
두 사람은 고덕 신도시 중앙공원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32평(전용 84㎡) 신축 로열층 아파트를 계약했다. 분양가 5억 8천만 원. 현수는 망설임 없이 계약금 5천8백만 원을 폰뱅킹으로 즉시 이체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소장님, 계약금 입금 확인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현수 고객님. 삼진전자 정규직이시라 우대금리 혜택까지 완벽하십니다."
모델하우스에서 나오는 길, 은하는 현수의 팔짱을 으스러져라 끼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생 곰팡이 핀 반지하 단칸방과 낡은 원룸 전월세를 전전하며 "못질 하나 마음대로 못 한다"고 눈물짓던 35세 직장 여성의 설움이 마침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오빠…… 우리 집이야. 드디어 우리 집이 생긴 거야……"
내 집이 생겼다는 안도감은 두 사람의 씀씀이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마트에서 100원짜리 할인 쿠폰을 챙기고 유통기한 임박 스티커를 찾던 과거는 순식간에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현수는 14년 동안 덜덜거리며 타던 회색 아반떼를 정리하고, 수원 영통 전시장에서 묵직한 가죽 시트와 안락한 정숙성을 자랑하는 독일산 고급 수입 세단을 계약했다.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부드러운 중저음의 배기음이 가슴을 울렸고, 은하의 손에는 압구정에서 구입한 명품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자본이 던져준 성과금의 꿀물은 그렇게 일상의 모든 불안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
### 4. 풀빌라의 밤, 19금을 넘나드는 인간의 말초신경
회사는 공장 자동화 라인 교체 공사 기간 동안 전 직원에게 '유급 특별 휴가 60일'이라는 파격적인 선물을 안겼다.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월급은 매달 꼬박꼬박 꽂히고 있었고, 통장 잔고는 여전히 든든했다.
현수와 은하는 씀씀이를 아끼지 않고 제주 중문 절벽 위에 숨겨진 최고급 프라이빗 독채 풀빌라로 4박 5일간의 축하 여행을 떠났다.
하루 숙박비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풀빌라의 전면 유리창 너머로, 검푸른 제주 바다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발코니에는 온수 인피니티 풀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고, 얼음 버킷 속에는 최고급 샴페인 돔 페리뇽이 꽂혀 있었다.
"오빠, 꿈같아……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아."
물안개 자욱한 온수 풀에서 몸을 녹인 은하는, 물에 젖어 살결에 착 달라붙은 얇은 실크 슬립 차림으로 샴페인 잔을 들고 다가왔다.
투명하게 비치는 젖은 옷자락 아래로 드러난 은하의 쇄골과 잘록한 허리선, 그리고 발그레하게 상기된 볼.
지난 3년 동안 쥐꼬리만 한 월급과 결혼 자금 걱정에 억눌려 있던 본능이, 샴페인의 독한 알코올 기운과 함께 현수의 아랫배를 뜨겁게 달구었다.
현수는 잔을 내려놓고 은하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앗…… 오빠……"
젖은 슬립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고, 에어컨의 서늘한 공기가 닿은 은하의 나신(裸身) 위로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현수의 입술이 은하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순간, 서늘함은 순식간에 화염 같은 열기로 바뀌었다.
36.5도의 정상 체온이 아니었다.
흥분으로 38도까지 치솟은 피가 말초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곤두박질쳤다.
침실 킹사이즈 매트리스 위로 두 사람의 몸이 엉켜 들었다.
현수의 손길이 은하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를 꽉 그러쥐자, 은하는 참지 못하고 거친 비명을 삼키며 현수의 어깨를 손톱으로 파고들었다.
"하아…… 오빠, 앗……!"
땀방울이 맺힌 두 사람의 살결이 부딪힐 때마다 찰진 마찰음이 침실의 적막을 찢었다.
이성과 교양, 사회적 체면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번식과 쾌락을 위해 수억 년간 진화해 온 호모 사피엔스의 동물적 본능.
말초신경의 말단을 사정없이 찌르고 지나가는 짜릿한 전율과 뇌수를 태우는 오르가슴.
은하는 고개를 젖힌 채 헐떡이며 침대 시트를 미친 듯이 쥐어뜯었고, 현수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생명의 원초적인 박동을 은하의 깊숙한 곳까지 쏟아부었다.
폭풍 같은 정사가 지나간 뒤, 두 사람은 땀에 젖은 채 서로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나란히 누웠다.
현수는 거칠게 오르내리는 은하의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쿵, 쿵, 쿵.*
살아 숨 쉬는 인간의 피, 비린 땀 냄새, 그리고 말초신경이 토해낸 탈진할 듯한 황홀경.
인간이란 결국 이 불완전하고도 뜨거운 살결의 비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오빠…… 우리 굳이 공장 다시 나가야 할까?"
은하가 땀에 젖은 현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몽롱하게 속삭였다.
"기계가 다 해준다잖아. 성과금도 받았고, 아파트도 샀는데…… 오빠 손에 기름 묻히는 거, 나 이제 진짜 보기 싫어."
현수는 나른한 마취에 취한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맞았다. 왜 굳이 그 쇳가루 날리는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기계가 나사를 조이든 말든, 인간은 이렇게 욕망을 불태우며 편하게 살면 그만 아닌가.
그것이 자본이 건넨 달콤한 덫이라는 사실을, 땀에 젖은 침대 위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
### 5. 담장 밖의 소주잔, 강태식
### 5. 쇳가루를 마시는 자의 피눈물
그러나 바로 그 시각, 평택 2공장 앞 먹자골목의 허름한 해장국집.
바깥의 5월 햇살은 찬란했지만, 식당 구석의 공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평택 2공장 앞 눅눅한 먹자골목.
정직원들이 아파트를 사고 외제차를 몰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세상의 반대편,
간판 불이 반쯤 깨진 ‘원조 양평해장국’ 집의 공기는 시베리아의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탕!*
투명한 소주잔이 식탁에 거칠게 부딪혔다.
파견 하청 조끼를 입은 사내, 강태식(52세)의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톱 밑에는 30년간 아크 용접기를 쥐며 밴 지워지지 않는 쇳가루 때가 까맣게 박여 있었다.
투명한 소주잔이 깨질 듯 식탁에 내리꽂혔다.
기름때 찌든 파견 하청 작업복 조끼를 입은 사내, 강태식(52세)의 굵은 손마디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톱 밑에는 30년간 아크 용접기를 쥐며 박인 시커먼 쇳가루와 화상 흉터가 굳은살로 엉겨 붙어 있었다.
“……6억이란다. 본사 놈들은 6억씩 챙겨서 고덕에 아파트 사고 포르쉐 계약하러 다니는데…… 우리는 오늘부로 라인 비우고 짐 싸래.”
식탁 위에는 찌그러진 공구함과 빈 소주병 세 병, 그리고 구겨진 카카오톡 출력물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태식의 맞은편에 앉은 하청 동료들이 한숨을 쉬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날 낮, 본사 직원들이 샴페인을 터뜨리던 시각, 하청 노동자 300명의 휴대폰에는 인력 파견업체 소장의 단체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지: 원청사 자동화 설비 도입 지침에 따라 3라인 파견 도급 계약이 5월 31일부로 일괄 해지되었습니다. 캐비닛 비우시고 공구 반출 바랍니다.]**
**[공지: 원청사 자동화 라인 전환에 따라 3라인 도급 계약이 5월 31일부로 전원 해지되었습니다. 잔여 공구 반출 바랍니다.]**
해고였다.
성과급은커녕 퇴직 위로금 백만 원 한 푼 없었다.
지난겨울, 영하 15도의 칼바람을 맞으며 배관을 용접하고 쇳물을 뒤집어썼던 하청 노동자들은,
공장 바닥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치워지는 쓰레기 신세가 된 것이었다.
성과급은커녕, 지난달 잔업 수당 40만 원조차 하청업체 폐업으로 떼일 위기였다.
지난겨울 영하 15도의 칼바람 속에서 두께 50밀리미터 반도체 특수 가스 배관을 기어 다니며,
쇳물이 튀어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참아가며 용접 비드를 놓았던 하청 노동자 300명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것이었다.
그때, 외제차 매장을 둘러보고 동료들과 2차로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던 현수와 태식의 눈이 마주쳤다.
현수의 손에는 명품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태식의 앞에는 빈 소주병 세 병과 찌그러진 공구함이 놓여 있었다.
“……6억이란다, 씨발.”
태식의 맞은편에 앉은 늙은 배관공이 소주를 병째로 들이켜며 피눈물을 흘렸다.
“클린룸에서 에어컨 쐬던 본사 놈들은 6억씩 챙겨서 고덕에 아파트 사고 포르쉐 샀다고 자랑질인데…… 쇳가루 마셔가며 배관 깔아준 우리는 개뼉다귀처럼 버려졌어.”
“어, 현수 씨…… 소식 들었어. 축하해, 6억이라며.”
그때 식당 유리문이 열렸다.
새로 뽑은 독일산 SUV 키를 손가락에 걸고, 은하에게 줄 한우 세트를 들고 들어서던 현수가 태식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태식이 갈라진 쉰 목소리로 잔을 채워 내밀었다.
그 눈빛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30년 육체노동이 단 한순간에 무가치한 쓰레기로 폐기 처분된 자의 깊고 메마른 체념만이 서려 있었다.
현수의 옷에서는 고급 향수 냄새가 풍겼고,
태식의 몸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쉰 땀 냄새와 절삭유 냄새가 진동했다.
“태식 형님…… 저……”
“……현수 씨.”
태식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퀭한 눈에는 분노조차 말라붙은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아니야, 현수 씨가 무슨 죄가 있겠어. 정직원이고 배운 기술자니까 대우받는 거지. 근데 현수 씨, 내 손 좀 봐봐.”
“태식 형님……”
현수는 들고 있던 차 키를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에 감추었다.
태식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쇳물 불똥에 타들어 간 화상 흉터, 관절염으로 마디마디가 뒤틀린 손가락.
“축하해, 6억 받았다며. 고덕에 좋은 아파트도 계약했다며.”
태식이 떨리는 손으로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현수 씨가 무슨 죄겠어. 원청 정직원이고 세상 물정 아는 사람이니 대우받는 거지. 근데 현수 씨…… 내 손 좀 봐봐.”
“내가 거제도 조선소부터 평택 배관까지 30년을 일했어. 내 손끝에서 나온 용접 비드는 0.1밀리미터도 안 틀렸다고 자부했는데…… 은빛 기계 놈들이 들어온다고 하루아침에 나더러 나가래. 평생 쇳가루만 마신 늙은이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태식이 갈라진 손바닥을 펼쳤다.
화상으로 문드러진 손바닥, 관절염으로 마디마디가 꺾여 펴지지 않는 손가락.
태식은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 쓰디쓴 알코올 냄새 속에서, 현수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든 6억 5천만 원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저 늙은 용접공의 눈물과 피땀을 공장 밖으로 쓸어버리고,
자신들마저 안락한 나태의 늪에 빠뜨려 노동의 권리를 영원히 빼앗기 위해
자본이 던져준 가장 잔인하고 달콤한 ‘마취제’였던 것이다.
“내가 조선소부터 평택까지 삼십 년을 용접했어. 내 손끝에서 나온 비드는 단 0.1밀리미터도 샌 적이 없었다고. 그런데 저 은빛 쇳덩어리 기계 놈들이 들어온다고, 오늘부로 날더러 나가래. 평생 쇳가루만 마신 늙은이는…… 이제 처자식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하나……”
태식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 처절한 통곡 앞에서, 현수의 주머니 속에 든 6억 5천만 원의 수표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저 늙은 용접공의 살점과 피땀을 공장 밖으로 쓸어버리고,
자신들마저 영원한 나태의 늪에 빠뜨려 노동의 존엄성을 거세하기 위해
자본이 던져준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작별의 마취제’였던 것이다.
---
### 6. 은빛 침입자
### 6. 은빛 침입자의 강림
새벽 1시, 현수는 술자리를 빠져나와 공장 7라인 물류 창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창고 주변은 수십 개의 서치라이트가 대낮처럼 켜져 있었다.
새벽 1시, 평택 2공장 7라인.
철문이 열리며 검은 방수포에 싸인 거대한 목재 상자들이 크레인에 들려 들어왔다.
포장재가 뜯겨 나가자 드러난 것은 티타늄과 탄소 섬유로 마감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4세대 휴머노이드 모듈 ‘아틀라스-S’였다.
*치이익― 쿵.*
*지이잉―*
육중한 대형 트레일러 세 대가 정차하고, 검은색 방수포로 싸인 초대형 컨테이너들이 크레인에 들려 내려졌다.
컨테이너 외벽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
흉부의 푸른 광학 센서가 켜지자, 기계는 40킬로그램짜리 밸브 모듈을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아크 용접.
푸른 레이저 불꽃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번쩍이는 순간,
태식이 30년간 목숨 걸고 만들었던 완벽한 물결무늬 용접 비드가
단 3.2초 만에, 오차 0.001밀리미터로 은빛 강판 위에 새겨졌다.
**[ROBOTICS SYSTEM : ATLAS-S DUAL ARM]**
기계는 담배를 피우러 가지 않았다.
허리가 아프다고 파스를 붙이지도 않았고, 성과급을 달라고 머리띠를 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완벽하게, 지칠 줄 모르고 쇳덩어리를 조여나갔다.
포장재가 벗겨지자 드러난 기계는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고 우아했다.
무광 티타늄 합금으로 마감된 이중 실린더, 유선형 어깨, 그리고 푸른빛을 깜박이는 광학 렌즈.
기계는 작업대 위에 놓인 40킬로그램짜리 밸브 모듈을 단 한 치의 떨림도 없이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푸른 아크 불꽃을 뿜어내며 완벽한 물결무늬 용접선을 그어나갔다.
오차 0.001밀리미터. 체결 시간 3.2초.
태식이 30년을 바쳐 완성했던 피땀 어린 손기술을, 저 기계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치우고 있었다.
공장 언덕에 서서 그 은빛 군무를 내려다보던 현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받은 6억 5천만 원의 성과금 축배, 평택의 32평 신축 아파트, 풀빌라에서 은하와 나눈 말초신경의 뜨거운 살결……
그 모든 찬란하고 달콤한 유혹의 대가로, 인간은 자신의 노동과 역사의 무대를 기계에게 영원히 넘겨주었다는 것을.
평택 하늘 위로 새벽별이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인간이 가장 달콤한 안락함에 취해 스스로의 목줄을 기계에 바친 그 봄날,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가장 조용하고도 장엄한 멸종의 시계추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자 감상평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아직 등록된 감상평이 없습니다. 첫 감상평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