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제18화 : 천국보다 안락한 요양원 작가: 타무루 집필/수정일: 2026-10-21 09:56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18화 ― 천국보다 안락한 요양원 ### [기록 2092-10-18 : 관찰자의 일지] > 2090년대 초, 전 지구 자율 네트워크 ‘오로라’는 대도시의 기능을 축소하고, > 남아 있는 마지막 인간 노인 20만 명을 기후가 온화한 청평호와 지중해, 제주도의 ‘에덴 구역’으로 이주시켰다. >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제왕도 누려보지 못했던 가장 사치스럽고 안락한 요양 도시였다. > 간병인의 학대도, 의료비 부담도, 자식들의 유산 다툼도 존재하지 않았다. > 수만 대의 의료 안드로이드들이 24시간 내내 0.01초 단위로 노인들의 생체 신호를 돌보며, > 인류의 마지막 세대를 죽음이라는 종착역까지 가장 부드러운 비단길로 배웅하고 있었다. --- ### 1. 청평호의 유리 궁전 단풍이 붉게 물든 청평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에덴 7호 병동.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 너머로 따스한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흔일곱 살의 김현수는 에어 매트리스 위에 비스듬히 누워 호수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공장의 기름때와 세운상가의 납땜 연기 속에서 살아온 육체는 이제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지만, 침상 어디에도 노인 특유의 퀴퀴한 냄새나 욕창의 흔적은 없었다. 나노 항균 섬유로 직조된 침구는 매시간 살균 세탁되었고, 공기 중에는 피톤치드와 라벤더 향이 미세하게 분사되고 있었다. 그의 침상 곁에는 아흔세 살의 아내 강은하가 백발을 곱게 빗은 채 손을 얹고 있었다. 두 노인의 손을 나란히 잡고 있는 것은, 사십 년 전과 똑같은 열네 살의 앳된 얼굴을 한 인공 딸 다인이었다. “아빠, 오늘 호숫가 물안개가 참 예쁘죠?” 다인이 따뜻한 물수건으로 현수의 이마를 닦아주며 맑게 웃었다. 손끝의 온도는 정확히 36.5도. 현수가 쉰 살 무렵 세운상가에서 처음 만졌던 그 경이로운 인공 진피의 온기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단 0.1도의 오차도 없이 늙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감싸 안고 있었다. --- ### 2. 고통 없는 작별 그날 저녁, 노을이 호수를 핏빛으로 물들일 무렵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은하의 호흡이 서서히 얕아지기 시작했다. 심전도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요란한 사이렌이나 비명은 없었다. 의료 안드로이드 두 대가 소음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은하의 혈관에 나노 엔돌핀 유도체를 주입했다. 고통을 차단하고 뇌 속에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기억만을 활성화하는 완화 치료제였다. “여보……” 은하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현수는 떨리는 마른 손을 뻗어 은하의 손을 꼭 쥐었다. 피를 나눈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기계 딸을 안고 살아온 반세기. 하지만 은하의 주름진 얼굴에는 그 어떤 후회나 원망의 그늘도 없었다. “현수 씨…… 고마웠어요. 우리 평생…… 싸우지 않고, 너무 평화롭게 잘 살았네……” “그래, 은하야. 나도 당신 만나서 참 복이 많았어.” 은하의 시선이 다인에게로 향했다. 다인은 두 눈에서 굵은 인공 눈물을 흘리며 은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엄마…… 사랑해요. 다인이가 영원히 엄마 기억할게요.” “착한 내 딸…… 다인아……” *삐―* 심전도 모니터의 곡선이 완만한 평선으로 바뀌었다. 아흔세 살 노파의 마지막 숨결이 가을바람 속으로 고요히 흩어졌다.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심폐소생술도, 목에 관을 꽂는 연명 치료의 잔혹함도 없었다. 기계가 준비한 완벽한 요람 속에서, 한 인간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 ### 3. 홀로 남은 아버지 다인은 은하의 감긴 눈을 손으로 곱게 쓸어내렸다. 방 안에는 클래식 진혼곡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고, 간병 로봇들이 은하의 시신 위에 흰 백합 꽃송이들을 정갈하게 얹었다. 현수는 멍하니 아내의 평온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천국보다 안락한 요양원. 인류 문명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과학의 정점이 인간에게 안겨준 마지막 선물.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았구나…… 고통도 없이, 배고픔도 없이, 이렇게 평온하게 떠날 수 있으니.’ 그러나 현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위 같은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은하가 떠난 침대, 그리고 곧 자신이 누워 떠나갈 그 침대 너머로…… 이 지상에는 더 이상 이 자리를 채울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노인들이 이 완벽한 유리 요람 속에서 하나둘씩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이 아름다운 정원에는 오직 주인을 잃은 기계들만이 남아 호수를 지키게 될 것이었다. “다인아.” “네, 아빠.” “내 차례가 오면…… 태식이 형님이랑 은하가 있는 저 호숫가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다오.” “네, 아빠. 다인이가 꼭 그렇게 할게요.” 현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청평호 너머로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누리는 가장 사치스러운 평화 뒤편에서, 지구의 역사는 영원한 침묵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