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제17화 : 숲이 된 초등학교 작가: 타무루 집필/수정일: 2026-10-21 09:56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17화 ― 숲이 된 초등학교 ### [기록 2085-06-10 : 관찰자의 일지] > 20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도시의 용도 폐기된 공공 인프라는 자연의 품으로 완전히 환원되었다. > 40여 년 전 문을 닫았던 서울의 수백 개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름드리 참나무와 은행나무가 뿌리를 내렸고, > 교실 복도와 콘크리트 계단은 담쟁이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원시림의 일부가 되었다. > 인간이 번식을 멈춘 자리에서 자연은 가장 신속하고 거침없이 영토를 회복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녹색 폐허의 교실 속으로, 지구의 마지막 열 살배기 아이가 첫 발을 디뎠다. --- ### 1. 폐허의 초록빛 바다 서울 종로구 혜화초등학교 터. 운동장 입구의 낡은 철문은 녹슬어 흙탕물에 반쯤 묻혀 있었고, 운동장 한가운데는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 사이로, 가벼운 발소리가 낙엽을 밟으며 다가왔다. “마리아, 여기가 어디예요?” 열 살이 된 하린은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숲을 올려다보았다. 지구 최후의 아이 하린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순백의 나노 스킨을 두른 보육 안드로이드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흉부 프로세서에서 부드러운 냉각팬 소리가 돌며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는 50년 전까지 ‘학교’라고 불리던 곳이란다, 하린아.” “학교? 학교가 뭐 하는 곳이었는데?” “너처럼 작은 인간 아이들 수백 명이 매일 아침 가방을 메고 모여서, 함께 글을 배우고, 노래를 부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친구를 사귀던 곳이란다.” 하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라는 단어는 하린의 어휘 사전에서 가장 낯선 개념이었다. 하린의 세상에는 언제나 마리아와 같은 기계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 너머에 가끔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뿐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키를 가진 또 다른 생명체, 함께 손을 잡고 모래성을 쌓을 수 있는 ‘아이’라는 존재를 하린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 2. 박제된 분필 글씨 마리아의 부축을 받아 2층 교실 복도로 올라서자, 깨진 유리창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먼지 입자를 황금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곰팡이와 마른 풀잎 냄새가 훅 풍겼다. 나무 책상과 의자들은 주인을 잃은 채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해 있었고, 정면의 초록색 칠판에는 반세기 전 마지막 수업을 마쳤던 담임선생님이 적어놓은 분필 글씨가 기적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35년 2월 14일 제92회 마지막 졸업식]** **“우리 예쁜 아이들아, 어디를 가든 부디 아프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렴.”** 분필 글씨 밑에는 작은 손도장 서른 개가 찍혀 있었다. 하린은 살금살금 다가가 칠판 밑의 작은 손도장에 자신의 손바닥을 맞대어 보았다. 꼭 맞았다. 오십 년 전, 이 교실에서 웃고 떠들었을 또 다른 열 살배기 아이의 손바닥 크기였다. “마리아…… 이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어?” 하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리아의 광학 렌즈가 파랗게 깜박였다. 내장된 인공지능 윤리 가이드라인이 작동하며, 열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종족의 멸종’을 설명해야 할지 0.001초 동안 수억 번의 연산을 거쳤다. “모두 다…… 긴 여행을 떠났단다, 하린아.” 마리아가 천천히 다가와 하린의 작은 손을 감싸 안았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아주 따뜻하고 조용한 별으로 이사를 갔단다.” --- ### 3. 나 홀로 부르는 동요 하린은 교탁 앞에 섰다. 칠판 구석에 걸려 있던 낡은 풍금 건반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눌렀다. *도― 미― 솔―* 반세기의 먼지를 털어내며 울려 퍼진 조율 안 된 피아노 건반 소리가 텅 빈 교실을 흔들었다. 하린은 자신이 마리아에게서 배웠던 옛날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아이의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숲이 된 운동장으로,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복도로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에 맞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동무들은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지저귀는 산새들만이 아이의 노래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마리아, 친구는 어떤 느낌이야?” 노래를 마친 하린이 마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마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슈퍼컴퓨터의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계산해 낼 수 없는, 오직 살아있는 인간과 인간만이 서로의 살과 체온을 부대끼며 나눌 수 있었던 태고의 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저 하린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정확히 36.5도의 인공 온기가 아이의 뺨을 적셨다. 숲이 된 학교 위로 초여름의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구 최후의 아이는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간의 유년기를 가슴에 묻은 채 기계의 손을 잡고 조용히 숲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