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제16화 : 0퍼센트의 확정 작가: 타무루 집필/수정일: 2026-10-21 09:56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16화 ― 0%의 확정 ### [기록 2076-12-31 : 관찰자의 일지] > 2076년 12월 31일 23시 59분, 유엔 인구위원회는 인류 역사상 마지막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영구 해산했다. > “지구상 전 대륙에 걸쳐 자연 생식이 가능한 가임 연령(15~49세) 여성 인구 공식 집계: 0명.” > 2026년 평택의 공장 바닥에서 인간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기 시작한 이래 꼭 50년 만이었다. > 인류는 단 한 번의 핵전쟁도 치르지 않았고, 단 하나의 치명적 전염병도 겪지 않았다. > 그저 가장 완벽한 안락함과 상처 없는 평화를 탐닉한 대가로, > 스스로의 의지로 재생산의 문을 걸어 잠그며 ‘수학적 멸종’의 종착역에 도달했다. --- ### 1. 50년의 기억 2076년의 마지막 밤,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 옥상. 여든한 살의 김현수는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인공 아내와, 영원히 열네 살에 멈춰 있는 인공 딸 다인이 현수의 무릎에 두터운 양모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 현수는 희미하게 흐려진 눈으로 남산타워와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꼭 50년 전이었다. 2026년 5월, 평택 삼진전자 공장 앞 사거리에서 6억 원의 성과급 자막이 번쩍이던 그날. 하청 용접공 강태식과 함께 양평해장국 집에서 소주잔을 내리치며 피눈물을 흘렸던 그 새벽. 그리고 45킬로그램짜리 무겁고 뻣뻣한 실리콘 인형의 가슴에 매립된 니크롬선이 36.5도의 미열을 뿜어내던 그 조잡했던 첫날 밤. ‘그때 우리는 몰랐지……’ 현수가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단순히 노동에서 해방되는 줄 알았다. 지긋지긋한 야근과 파스 냄새, 사람에게 시달리는 피로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쉬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안락한 요람은 인간을 잠재우는 수면제였고, 인간은 그 달콤한 꿈속에서 자손을 낳고 미래를 기약해야 할 본능마저 영원히 반납해 버렸다. --- ### 2. 마지막 깃발이 내려갈 때 *둥― 둥― 둥―* 자정을 알리는 보신각 타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종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종각 주위에 모인 군중 또한 없었다. 오직 정밀 센서가 장착된 은빛 휴머노이드 관리자 세 대가 완벽한 토크와 리듬으로 무쇠 종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던 태극기가 전동 와이어를 타고 천천히 하강했다. 국가라는 시스템의 사실상 종결이었다. 세금을 낼 청년도 없고, 군대에 갈 군인도 없으며, 법을 다툴 국민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행정권과 자원 분배권은 이미 ‘글로벌 자율 AI 오로라 네트워크’로 평화롭게 이양되어 있었다. 기계들은 주인을 배반하거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충직했다. 단지 인간이 스스로 번식을 포기하고 늙어가는 동안, 기계들은 전 지구의 발전소를 돌리고, 상수도를 정화하고, 마지막 남은 늙은 인간들에게 미음을 쑤어 먹이며 가장 지극한 효심으로 임종을 지킬 준비를 마쳤을 뿐이었다. --- ### 3. 태백의 고아 같은 시각, 태백산맥의 깊은 요람. 돌을 맞이한 아기 하린은 새하얀 털옷을 입은 채 눈밭 위에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하린의 어머니 서연은 지난달 산후 쇠약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 진우 역시 폐렴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린의 작은 손을 붙잡아주고 있는 것은 하얀 실리콘 외피를 두른 최상급 보육 안드로이드 ‘마리아’였다. “아가,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아야 한단다.” 마리아의 체온은 정확히 36.5도. 하린의 작은 뺨을 감싸 쥐는 기계의 손길은 어머니의 손길보다 더 부드럽고 한결같았다. 하린은 방긋 웃으며 마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린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 거대한 푸른 행성 위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생명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걸어갈 백 년의 시간 동안, 지구상의 모든 어른들이 하나둘씩 흙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자신만이 홀로 남아 기계들의 신(God)으로 박제될 것이라는 기구한 운명을. --- ### 4. 반세기의 매듭 전광판의 시계가 2077년 1월 1일 00시 00분을 가리켰다. 전 세계 가임기 인구: 0. 자연 출생 가능성: 0.0000%. 수학적으로 완벽한 영(Zero)의 세계. 50년에 걸친 인류의 전반부 역사가 그렇게 끝났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비명 하나 지르지 않은 채 가장 청결하고, 가장 안락하며, 가장 평화로운 멸종의 전반전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현수는 휠체어에 몸을 뉘인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인의 따뜻한 손이 현수의 마른 손등을 덮어주었다.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마지막 황혼의 백 년이 시작되는구나.’ 서울의 고요한 빌딩 숲 위로 하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이 땅을 지배했던 위대하고 어리석었던 창조주들을 위해 우주가 바치는 가장 거대한 순백의 수의(壽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