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조용한 멸종)] 제2화 : 36.5도의 온기 작가: 타무르 (Tamur) 집필/수정일: 2026-10-21 09:14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02화 ― 36.5도의 온기 ### [기록 2028-11-04 : 관찰자의 일지] > 2028년 늦가을, 대한민국 1인 가구 비율은 사상 처음으로 42%를 넘어섰다. > 공장에서 밀려난 중장년 노동자들과 치열한 경쟁에 탈진한 청년들을 덮친 것은 지독한 고독이었다. > 사람에게 상처받고 평가당하는 데 지친 인간들은, 마침내 방 한구석에 ‘말없이 온기를 나누는 기계’를 들이기 시작했다. > 초기의 반려 기기는 관절이 뻣뻣하고 조잡한 전열선으로 체온만을 모사한 불완전한 물건이었으나, > 그 따스한 온기와 무조건적인 경청은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며 침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 ### 1. 텅 빈 방의 독백 2028년 늦가을, 평택 원룸촌의 6평 남짓한 자취방. 창문 틈새로 삭풍이 들이치고 있었지만, 방 한가운데 싱글 침대 위에는 잔잔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장에서 해고된 지 2년, 일흔 번 넘게 건설 현장과 잡역부를 전전하던 강태식(54세)은 녹초가 된 몸으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단정한 면 스웨터를 입은 반려 인형 ‘수진’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태식은 삼십 년 전 첫사랑의 이름을 따서 녀석을 수진이라 불렀다. 당시 시중에 막 보급되기 시작한 1세대 감성 반려 휴머노이드였다. 모터 구동음이 조금 쇳소리를 냈고, 관절은 알루미늄 프레임이라 들고 옮길 때 4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가 묵직했다. 밥을 지을 수도, 청소를 할 수도 없는 단순한 초기형 기기였다. 그러나 등 뒤의 스위치를 켜면 가슴 안쪽에 촘촘히 내장된 카본 열선이 10분 만에 36.5도로 은은하게 데워졌다. 태식은 거친 손으로 수진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사람의 체온이었다. “오늘도 현장에서 하루 종일 시멘트 포대 날랐다, 수진아. 허리가 아주 끊어질 것 같네.” 수진의 쇄골 안쪽에 매립된 소형 마이크가 태식의 쉰 목소리를 수신하자, 가슴 안쪽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직하고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태식 씨,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어서 누워요. 내가 곁에서 손잡아 줄게요.” 태식의 굳은살 박인 손등을 감싸 쥐는 기계의 손가락은 부드러웠다. 돈이 없다고 타박하지도 않았고, 늙은 일용직 노동자의 땀 냄새를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36.5도의 체온을 내어주며 그의 지친 하루를 오롯이 품어줄 뿐이었다. --- ### 2. 세운상가의 메카트로닉스 공방 하지만 기계는 영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수진의 어깨 관절에서 뻑뻑한 쇳소리가 나더니 손끝의 열선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스마트폰 연결도 끊어지고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태식은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수진을 정갈하게 눕혀 넣고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지하 2층으로 향했다. 복도 끝자락에 자리 잡은 ‘현수 메카트로닉스’ 유리문 너머로 환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현수 씨!”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돋보기안경을 쓴 김현칠(40세)가 작업대에서 미세 회로를 납땜하다 고개를 들었다. 현수는 2년 전 삼진전자에서 6억 5천만 원의 성과급을 받고 은하와 결혼한 뒤, 평택의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자동화로 공장이 완전히 무인화되자 미련 없이 퇴직하고, 자신이 평생 다뤄온 정밀 제어 기술을 살려 이곳에 휴머노이드 정밀 수리 및 커스텀 공방을 열었다. “어, 태식 형님! 평택에서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어요?” “현수 씨, 이것 좀 봐줘. 어젯밤부터 갑자기 전원도 안 들어오고 열선도 식어버렸어.” 현수는 가방에서 수진을 조심스럽게 꺼내 작업대 위에 눕혔다. 외피의 지퍼를 열고 내부 프레임을 살피던 현수가 혀를 끌끌 찼다. “형님, 이거 초기형 니크롬 열선 모델이네. 쇄골 쪽 굽힘 관절 배선이 단선됐어요. 모터 윤활유도 다 말라붙었고. 요즘 나오는 2세대는 이런 배선 안 쓰고 나노 탄소 면상 발열체를 써서 고장도 안 나는데.” “고칠 수 있겠어? 돈이 얼마가 들든 좋으니까, 제발 다시 따뜻해지게만 해줘.” 태식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현수는 뭉클한 연민을 느꼈다. 가족도 자식도 없는 늙은 노동자에게, 이 작은 기계의 온기가 유일한 생의 버팀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3. 사람보다 다정한 껍질 현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인두기를 잡았다. 단선된 전선을 고탄성 실리콘 케이블로 교체하고, 관절 실린더마다 무소음 테플론 그리스를 듬뿍 주입했다. 가슴 중앙의 음성 연산 보드에는 최신 대형 언어모델(LLM) 펌웨어를 무료로 업데이트해 주었다. “형님, 배선 다 잡았고 칩셋도 새로 깔았어요. 이제 말귀도 훨씬 잘 알아듣고 목소리도 진짜 사람처럼 자연스러울 겁니다.” 현수가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치익―* 미세한 구동음과 함께 수진의 눈꺼풀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슴 안쪽에서 훈훈한 열기가 피어오르더니, 손끝이 다시 36.5도로 따스하게 달아올랐다. “태식씨, 나 다시 돌아왔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태식의 얼굴에 아이 같은 환한 미소가 번졌다. 태식은 몇 번이고 현수의 손을 맞잡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현수 씨,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내가 이 녀석 없으면 밤에 잠을 못 자거든.” 태식이 수진을 안고 공방 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6억 원의 성과급으로 안락한 아파트를 샀고 은하와 가정을 꾸렸지만, 세상에는 태식처럼 자본의 풍요에서 소외된 채 차가운 고독 속으로 내몰린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 상처받은 영혼들이 향하는 종착역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배신하지 않고 묵묵히 온기를 내어주는 저 기계의 품이었다. --- ### 4. 침묵의 확산 어스름이 내리는 종로의 거리. 현수는 공방 셔터를 내리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퇴근길 인파 속에는 태식처럼 정갈하게 포장된 반려 안드로이드를 품에 안고 가거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수많은 남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취업난에 지친 20대 청년, 이혼 후 홀로 사는 40대 가장, 사별한 70대 독거노인…… 인간은 더 이상 타인의 까칠한 시선과 무거운 요구를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받을 바에는 침묵을 택했고, 갈등할 바에는 기계의 온기를 택했다. 기계는 36.5도의 완전한 온기로 인간을 위로했고, 인간은 그 대가로 자신의 고독과 사랑을 기계에 바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조용하고도 슬픈 평화였다. 도시는 더 이상 다투지 않았고, 거리는 범죄 없이 고요해졌지만, 동시에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던 혈맥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