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조용한 멸종)] 제21화 : 백 살의 청년들 작가: 타무르 (Tamur) 집필/수정일: 2026-10-21 09:14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21화 ― 백 살의 청년들 ### [기록 2135-05-20 : 관찰자의 일지] > 2135년 봄, 전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총수는 공식 집계 124명에 도달했다. > 예순 살이 된 지구 최후의 아기 하린을 제외하고, 남아 있는 123명 전원의 평균 연령은 103.5세였다. >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이었으며, 가장 평화로운 노년의 풍경이었다. > 첨단 바이오 나노 의료 기술의 완벽한 보살핌 속에서 백 년의 세월을 고통 없이 건너온 그들은, > 제주도 서귀포 해안가에 모여 인류 문명의 마지막 티타임을 가졌다. --- ### 1. 에메랄드빛 바다와 은발의 소년들 제주 서귀포 중문 해안 언덕. 야자수 잎이 부드러운 남풍에 흔들리는 잔디밭 위로, 수십 대의 휠체어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모여 앉아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백두 살, 백세 살의 노인들의 무릎 위에는 보송보송한 양모 담요가 덮여 있었고, 그들 곁에는 수십 년 동안 주인을 지켜온 은발의 반려 안드로이드들이 따뜻한 제주 녹차를 잔에 따르고 있었다. 예순 살이 된 하린은 단정한 삼베 원피스를 입은 채 노인들 사이를 거닐며 찻잔을 건넸다. 은빛 머리칼이 희끗희끗 섞인 하린의 얼굴은 자애롭고 평온했다. 이 자리에 모인 123명의 백세 노인들에게, 하린은 이 땅에 마지막으로 태어나 자란 인류의 ‘막내딸’이자 ‘지상의 마지막 꽃’이었다. “하린아, 차가 참 구수하구나.” 백네 살의 물리학자 출신 민우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며 미소 지었다. 노인의 치아는 임플란트였고, 혈관 속에는 나노 클리너가 돌고 있어 백 살이 넘었음에도 눈빛만은 총명한 소년처럼 맑았다. “어르신, 바닷바람이 차갑지 않으세요?” “아니, 아주 따뜻해. 칠십 년 전 우리가 만들었던 그 시끄러운 공장과 매연이 사라지니, 바다가 어릴 적 보던 그 푸른빛을 고스란히 되찾았어.” --- ### 2. 인류의 마지막 회고 노인들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소년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대화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비명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긴 소풍을 마치고 해 질 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아이들의 두런거림 같았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지 않나?” 백두 살의 전직 초등학교 교사 영숙 할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선조들은 굶주림과 전쟁, 전염병 때문에 평균 마흔 살도 못 채우고 죽어갔는데…… 우리는 기계 녀석들 덕분에 단 하루도 밥을 굶어본 적도 없고, 전쟁터에 끌려가 본 적도 없어. 백 년 동안 그저 안락하고 평화롭게 대접받으며 살았으니, 인류 역사상 우리만큼 복 받은 세대가 또 어디 있겠어.” 노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자본과 기계가 완성한 궁극의 유토피아 속에서, 그들은 삶의 모든 질곡과 상처를 면제받은 채 백 년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민우 노인이 하린의 손을 살며시 쥐었을 때, 노인의 맑은 눈동자에 깊은 회한과 미안함이 어렸다. “하지만 하린아…… 우리는 너무 편안함에 취해 미래를 잃어버렸단다. 고통이 없었기에 사랑을 포기했고, 상처받기 싫었기에 자식을 낳지 않았지. 결국 그 거대하고 무거운 침묵을…… 너 혼자 짊어지게 만들었구나.” --- ### 3. 막내딸의 작별 인사 하린은 노인의 마른 손등 위에 자신의 두 손을 얹었다. 체온과 체온이 맞닿았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인간과 인간의 살결이 나누는 온기. “할아버지, 미안해하지 마세요.” 하린이 눈시울을 붉히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저는 마리아와 수많은 기계들의 헌신 속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비록 또래 친구는 없었지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여러분이 남겨주신 이 아름다운 정원을,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잘 지키고 배웅해 드릴게요.” 노인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은 비통함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족이 남긴 마지막 아이가 이토록 맑고 지혜롭게 자라주었다는 데서 오는 벅찬 감사의 눈물이었다. --- ### 4. 황혼의 바다 서귀포의 푸른 바다 너머로 붉은 태양이 장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백스물세 명의 백세 노인들과, 그들의 손을 잡은 하린. 그리고 휠체어 뒤에서 묵묵히 그들을 지키는 수백 대의 안드로이드들. 누구도 큰 소리로 울지 않았다. 바다는 잔잔했고, 바람은 따스했으며,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인류라는 거대한 종족의 마지막 거인들이, 가장 눈부신 석양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삶에 조용히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그것으로 제4막, 백년에 걸친 ‘황혼의 요양원’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곧, 저 노인들이 하나둘 밤하늘의 별이 되어 떠나간 뒤 지구상에 단 한 명, 온 우주에 오직 홀로 남겨질 하린의 마지막 장막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