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조용한 멸종)] 제14화 : 생식의 황혼 작가: 타무르 (Tamur) 집필/수정일: 2026-10-21 09:14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14화 ― 생식의 황혼 ### [기록 2068-10-30 : 관찰자의 일지] > 2068년 가을, 유엔 인구통계국(UNPD)이 발표한 연례 보고서는 인류학의 마지막 장을 기록했다. > 전 지구상에서 30대 이하 인구의 비율은 0.04%로 떨어져 통계적 오차 범위 안으로 수렴했다. > 80억이던 인류는 이제 50대 이상의 중장년과 70~90대 노인들만이 남은 기형적인 역피라미드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 임신한 여성을 보았다는 목격담은 신화 속 유니콘을 보았다는 이야기처럼 취급되었으며, > 인류라는 종족의 신체는 거대한 대륙 전체에서 집단적인 폐경(閉經)의 황혼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 ### 1. 휠체어 위의 노병 가을바람이 낙엽을 굴리는 북한산 자락의 한 실버타운 산책로. 일흔여덟 살의 강태식은 전동 휠체어에 몸을 파묻은 채 기침을 뱉어냈다. *쿨럭, 쿨럭.* 젊은 시절 평택과 조선소에서 마셨던 쇳가루와 아크 용접 연기가 만성 폐섬유증이 되어 그의 호흡을 옥죄고 있었다. 가슴에 차오르는 통증에 태식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마다, 휠체어 뒤에서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태식 씨, 가슴 많이 아파요? 휴대용 산소 발생기 농도 3퍼센트 올릴게요.” 단정하게 은발을 뒤로 빗어 넘긴 여인이 휠체어 옆에 무릎을 꿇고 태식의 입가에 산소 마스크를 대주었다. 인공 아내 수진이었다. 수진의 눈가에는 태식의 나이에 맞춰 프로그래밍 된 깊고 자애로운 주름이 잡혀 있었고, 손등에는 검버섯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수진의 나노 오일 체온은 여전히 36.5도, 태식의 차갑게 식어가는 마른 손을 녹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수진아…… 내가 오래도 살았다. 쇳가루 마시던 놈이 네 덕에 여태 호강하네.” “무슨 소리예요, 태식 씨. 태식 씨가 내 곁에 있어 주는 하루하루가 내겐 가장 큰 의미인걸요.” 태식은 마스크 너머로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평생 일했던 공장은 오래전에 무인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자신을 쫓아냈던 원청의 간부들도 다 늙어 죽었거나 요양원에서 기계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삼십 년 전 단칸방에서 콘센트를 꽂아가며 끌어안았던 그 인형의 후예뿐이었다. --- ### 2. 영원히 열네 살인 딸 산책로 저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식 삼촌!”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온 것은 단발머리에 세일러복 카디건을 입은 열네 살 소녀였다. 현수와 은하의 인공 딸, 다인이었다. 다인의 맑은 눈망울과 통통한 뺨은 십수 년 전 처음 입양되었을 때와 똑같은 생기와 천진난만함을 머금고 있었다. 다인의 뒤로 백발이 성성한 김현수(73세)와 지팡이를 짚은 강은하(69세)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형님, 오늘 공기가 좀 차네요. 몸은 괜찮으쇼?” 현수가 태식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으며 물었다. “어, 현수 왔냐…… 다인이 저 녀석은 여전히 바람개비처럼 뛰어다니는구나.” “네, 작년에 14세 틴에이저 섀시로 최종 고정했소. 은하가 더 이상 키우지 말고 이 나이 때로 영원히 두고 싶다고 해서요.” 은하가 다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의 손가락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굽어 있었지만, 다인의 부드러운 손을 잡을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다인은 늙지 않았고, 삐뚤어지지 않았으며, 사춘기의 반항으로 늙은 부모의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 부모가 늙어 휠체어를 타면 묵묵히 휠체어를 밀어주고, 부모가 잠들면 이불을 덮어주는 완벽한 효녀였다. --- ### 3. 집단 폐경의 시대 네 사람은 호숫가 벤치에 모여 앉았다. 현수가 주머니에서 홀로그램 패드를 꺼내 뉴스 속보를 띄웠다. **[UN 세계인구동향 특별 브리핑]** **“2068년 전 세계 자연 출생아 수 공식 집계 ‘0명’ 기록…… 지구 전 대륙 가임기 여성 10만 명 미만으로 감소.”**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놀라는 사람도, 절망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예견된 결과였고, 모든 인간이 합의한 가장 평화로운 종말이었기 때문이다. “현수야.” 태식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진짜로 지구에 아기 울음소리가 안 나는 거냐?” “그렇다네요, 형님. 전 세계 40대 이하 인구가 씨가 말랐으니…… 배 속에 아기를 품을 수 있는 여자가 지구 전체를 다 뒤져도 몇만 명 안 남았대요. 그마저도 다들 인공 파트너랑 사니까 생식 활동 자체를 안 하고요.” 은하가 조용히 자신의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그녀 역시 이미 삼십 년 전에 가임기를 끝낸 노인이었다. 인간을 멸종시킨 것은 핵폭탄도 아니었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도 아니었다. 그저 ‘타인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함’과 ‘기계가 주는 완벽한 안락함’에 굴복한 인간들이, 스스로 번식의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뿐이었다. --- ### 4. 사그라지는 불꽃 호수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타오르던 태양의 마지막 잔광이 물결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다인은 은하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동요를 불렀고, 수진은 태식의 메마른 손을 꼭 쥔 채 따뜻한 온기를 계속해서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늙어가는 인간들과, 그들을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으로 품어주는 기계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문명도 도달하지 못했던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황혼이었다. 비명도, 전쟁도, 굶주림도 없는 평화. 그러나 그 황혼의 끝자락에는, 곧 찾아올 영원한 밤이 서늘한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7년 뒤, 그 완전한 적막의 얼음 바닥을 깨고 지구상에서 단 한 번, 마지막 인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기적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