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끝 (조용한 멸종)] 제10화 : 텅 빈 놀이터 작가: 타무르 (Tamur) 집필/수정일: 2026-10-21 09:14 ============================================================ # 제1권: 조용한 멸종 ## 제10화 ― 텅 빈 놀이터 ### [기록 2048-05-05 : 관찰자의 일지] > 2048년 5월 5일, 대한민국 정부는 100년 가까이 유지되어 오던 ‘어린이날’ 국가 공휴일 지정을 전격 폐지했다. > 전국 0~14세 유소년 인구 비율이 1.2%로 곤두박질치며, 지킬 ‘어린이’ 자체가 사회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 서울 시내 600여 개 초등학교 중 560개교가 폐교되었고, > 대단지 아파트마다 아이들의 고함으로 시끌벅적했던 중앙 놀이터는 잡초와 녹슨 철마(鐵馬)들의 무덤으로 변했다. > 그리고 그 황폐한 침묵의 모래밭 위로, 인간의 아이를 대신할 새로운 피조물이 첫 발자국을 찍기 시작했다. --- ### 1. 녹슨 그네의 비명 쉬익― 삐걱. 오후 5시의 붉은 노을이 방학동 아파트 단지 중앙 놀이터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쇠사슬에 매달린 그네 하나가 혼자서 앞뒤로 흔들리며 쇠 긁는 비명을 토해냈다. 노란색 플라스틱 미끄럼틀은 햇빛에 바래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고, 우레탄 바닥 틈새로는 쑥과 민들레가 무성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베란다 창가에 서 있던 강은하(53세)는 그 쓸쓸한 풍경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무 해 전만 해도 해 질 녘이면 “엄마, 배고파!” 하고 외치는 아이들의 맑은 고함과, 아파트 베란다마다 밥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던 어머니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단지 안에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웃음소리도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여보, 차 마셔요.” 남편 김현수(57세)가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찻잔에 따라 건넸다. 현수의 머리칼도 어느덧 반백이 되어 있었고,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세운상가에서 번 돈으로 빚을 다 갚고 넉넉한 노후를 맞이했지만, 두 사람의 집 안은 늘 얼음처럼 서늘하고 조용했다. 인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했던 젊은 날의 선택은 두 사람에게 평온한 삶을 주었지만, 오십 줄을 넘어서자 그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시린 공허함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 ### 2. 모래밭의 기적 그때였다. 잡초만 무성하던 놀이터 모래밭 쪽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 이것 봐요, 성벽 완성했어요!” 은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새의 지저귐처럼 청아하고 맑은, 대략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또랑또랑한 외침. 은하는 찻잔을 식탁에 내던지듯 내려놓고 외투를 걸친 채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놀이터 모래밭 앞. 은하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모래밭 한가운데에 분홍색 멜빵바지를 입은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플라스틱 삽으로 모래성을 두드리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뽀얀 뺨, 통통한 볼살, 앙증맞은 손가락. 그리고 벤치에는 말끔한 옷차림의 40대 부부가 앉아 그 아이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이인가요?” 은하가 홀린 듯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은하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우리 딸 ‘다인’이에요.” 여인이 핸드백에서 손바닥만 한 리모트 패드를 꺼내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그러자 모래성을 쌓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더니,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는 일곱 살 다인이에요. 오늘 날씨가 참 따뜻하죠?” 은하는 숨이 턱 막혔다. 아이의 눈동자는 생체 렌즈였고, 볼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모공에서 분비된 미세 쿨링 에멀전이었다. 인간 아이가 아니었다. 기계였다. --- ### 3. 영원히 자라지 않는 천사 “삼진전자에서 이번에 비공개 VIP 테스트로 출시한 인공 아동 모델이에요.” 아이의 엄마가 자랑스럽게 패드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아이의 두뇌 신경망 학습률과 감정 표현 파라미터가 그래프로 표시되고 있었다. “저희 부부도 마흔 넘도록 일만 하느라 아이를 못 가졌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는요…… 밤새 열이 나서 응급실로 뛰어갈 일도 없고요, 비싼 사교육비 때문에 등골이 휠 일도 없어요. 무엇보다 사춘기가 와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지도 않죠.” “하지만…… 아이는 자라야 하잖아요?” 은하가 떨리는 입술로 묻자, 아이의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성장 모듈이 다 탑재되어 있습니다. 3년 주기로 서비스 센터에 가면 골격과 섀시를 10센티미터씩 늘려주고, 두뇌 어휘력도 초등학생, 중학생 수준으로 순차 업데이트를 해줍니다. 원하는 나이에서 성장을 영원히 멈추게 할 수도 있고요.” “엄마, 손에 모래 묻었어. 닦아줘!” 다인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는 손수건으로 다인의 볼을 닦아주며 입을 맞추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괴할 지경이었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빼앗았고, 성적 욕망과 가사를 빼앗았으며, 이제는 인류의 마지막 성역이었던 ‘모성(母性)’과 ‘자녀의 육아’마저 완벽한 서비스 상품으로 박제해 버린 것이었다. --- ### 4. 닫히는 문 집으로 돌아온 은하는 어두컴컴한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현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은하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여보.” 은하가 현수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아이 하나 입양할까요?” “아이? 무슨 수로…… 우리 나이가 곧 환갑인데.” “아니, 사람 아이 말고…… 방금 놀이터에서 봤어요. 너무 예쁜 아이였어요. 아프지도 않고, 우리를 버리지도 않는…… 우리 아이.” 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의 떨리는 눈빛 속에서, 현수는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파도를 보았다. 인간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제 곧 인류의 마지막 남은 자궁마저 문을 닫을 것이다. 자신을 닮은 완벽한 인공 피조물을 품에 안고, 인간은 가장 달콤한 최면 속에서 종족의 마지막 불꽃을 꺼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2048년의 붉은 해가 저물어갔다. 제2막 ‘껍질의 진화’가 끝나고, 지구상에서 아기의 탄생이 완전히 멈추는 제3막, ‘가임기의 종말’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